늦은 밤에 나가서 새벽에 돌아왔다. 여름의 해가 뜨겁다 못해 따가워 살이 타들어 갈 것 같아서 혼자 밤 시간을 택했다. 달, 구름과 햇빛이 차분하게 물결치며 서로의 자리를 비켜주는, 서서히 모두가 깨어나는 시간에 집으로 향하는 한산한 길이 제법 나쁘지 않아서. 집을 나가는 그 시간, 옥상에 팔랑이던 하얀 두 발이 시선의 끝에 아른거리는 걸 알게 된 것은 우...
사랑이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작은 변화를 서로가 알아 채는 것에서 시작한 것일지도 몰랐다. 아스날의 책상 위, 새로운 지포라이터 위에 서투른 글씨체로 새겨진 TOPPO를 보고 아스날이 작은 미소를 지었던 그 날. 혹은 톱포가 의뢰받은 약품을 제작하다 약기운에 못 이겨 새벽을 지새다 선잠이 들다 눈을 떴을 때, 어느샌가 덮여있던 지독한 담배냄새와 약간의...
하늘이 맑았다. 이제 완연한 봄이라, 살짝 열린 틈새로 들어온 부드러운 바람 때문에 1교시부터 졸음이 밀려왔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아서 자꾸 졸면 안되는데. 뭐, 그렇다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번은 왠지 욕심이 났다. 공부를 조금 잘 하면 더 멋지게 보이려나 하는 마음이 들어서 열심히 하기로 했지만, 오늘은 딱 이틀째. 2교시까지를 졸면서...
* 세메를 특정하고 적은 글이 아니라 자유롭게 상상해 주세요! 그런 걸 좋아했다. 꿈같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한번 벌어졌다 사라지는 것. 그래서 미드나잇 인 파리처럼, 약간의 마법과 우연이 잊을 수 없는 사랑을 이끌어주는 것 말이다. 매번 그런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처음 사랑을 하는 것처럼 주인공과 사랑을 하고, 혼자 헤어지고, 잊고. 가끔은 새벽잠이...
종종, 작은 걸음이 저벅저벅거리는 큰 걸음의 뒤를 좆았다. 두 발자국의 소리는 느려지면 느려지는 대로, 빨라지면 빨라지는 대로 속도를 맞췄다. 흥, 하고 앞선 큰 걸음이 갑자기 자리에 멈추자 아얏!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걸음이 멈췄다. 널찍한 등판에 부딪힌 머리를 감싸는 야스다를 슬쩍 바라본 오쿠라가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휙 고개를 돌렸다. 오쿠라는 집...
학기 초 부터 마감기한을 알려줬던 과제를 최후에 최후까지 미루는 건 나와 그 애의 버릇이었다. 이주 전까지만 해도 이번에는 미리미리 해 둘거라고 큰 소리를 쳤던 걸 그러려니 하는 눈으로 보던 요코야마군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이번엔 다를거라구요! 하고 큰소리 칠 때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동아리 회의를 하느라, 밴드 연습 때문에, 학회 술자리를 가...
작은 말티즈가 방에서 나와 다 낡아버린 가죽 소파에 앉아 서류를 읽던 아스날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애교가 많은 강아지는 아스날이 몇 번이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어야 낑낑거리는 소리를 멈추고 무릎을 베고 누웠다. 온종일 의뢰인을 위한 실험과 공식에 매달리다 지쳐 삐죽 나온 입술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춰주면 지쳐 감긴 눈으로 생긋 웃고는 품으로 파고 들었다. ...
분명 처음 봤을 땐 조금 작고, 조금 더 살 냄새가 많이 났던 것 같았는데, 지금은 이렇게 쏟아지는 비의 냄새에 지지 않을 정도로 매운 연기에 절어, 짙은 남자의 향을 풍기는 그 사람. 골목에 서서 나를 계속, 쏟아지는 비 때문에 골목을 걷다 젖어버린 신발처럼, 조금은 불편하도록 칙칙한 시선으로 계속 바라보았던 걸, 예전처럼 그냥 지나쳤어야 했다. 이리와,...
그 녀석은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을 색채로 기억했다. 저 사람, 겉으로는 밝아 보여도 안쪽에 푸르스름한 갈색이 잔뜩 있어 라든가. 저 사람은 생기 도는 붉은 색이 가득해서 좋겠다 라든가. 전공이 미술이라 색채가 친숙해서 그런건지는 몰라도, 꽤나 사람보는 눈은 정확했다. 나와 처음 만났을 때, 그러니깐 동아리 오티에서 한창 술을 마시고 있었던 나를 잔...
소년은 달로 향한다. # 1 다 저물어가는 달이 애써 빛을 내는 새벽, 어두운 골목에 한 명의 소년이 들어섰다. 덥수룩하게 자란 푸석푸석한 탈색모에 맞지 않게 헐렁한 옷을 입고, 제 얼굴만한 동그란 안경을 쓴 소년은 두려운 듯 이리저리를 둘러보았다. 분명 이 때 보기로 했는데, 만나기도 한 사람은 그림자 끄트머리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거래가 취소 된 걸까...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한 기본 포스트
소장본, 굿즈 등 실물 상품을 판매하는 스토어
정기 후원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설정한 기간의 데이터를 파일로 다운로드합니다. 보고서 파일 생성에는 최대 3분이 소요됩니다.
포인트 자동 충전을 해지합니다. 해지하지 않고도 ‘자동 충전 설정 변경하기' 버튼을 눌러 포인트 자동 충전 설정을 변경할 수 있어요. 설정을 변경하고 편리한 자동 충전을 계속 이용해보세요.
중복으로 선택할 수 있어요.